찌르르 blog

 자고 있는 상분이의 가슴팍에 누워서 가만히 있으면 곧 '뜍, 뜍' 하고 가슴 뛰는 소리가 들린다. 지난밤에는 자다가 새벽 두 시에 깼는데, 이게 내 가슴 소리인지 상분이 가슴 소리인지 헷갈려서 상분이 가슴에 손을 올려서 박동을 확인했다. 손에서 가슴이 불끈, 하면 0.01초 정도 뒤에 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상분이 가슴 소리가 맞구나. 발로 차낸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조금 토닥여주고, 이를 갈면 턱을 잡아주고, 귀에 꽂고 있던 에어팟을 빼주고 잠들었다.

 

 그런데 상분이는 내가 코 고는 소리를 녹음해서 나한테 들려줬다. 내 코 고는 소리 시끄러워서 에어팟 끼고 잤다고. 이런 배은망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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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시 반에 시작한 회의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회의록을 정리하고 밥을 먹으러 거실로 나갔다. 원래는 김밥이나 순두부찌개를 먹으려다가 집에 있던 볶음밥을 싹 먹어치웠다. 일인분 좀 넘는 양을 영상을 보며 천천히 먹고 나니 배가 불렀다. 

 

 영상을 보며 점심을 먹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그동안은 사무실에서 혼자 책 읽으면서 먹거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나가서 먹었는데 재택근무를 시작하니 점심시간이 훨씬 더 편하고 자유로워졌다. 어제부터 보기 시작한 알로하융님의 크리에이터 이코노미 영상을 봤는데 부럽기도 하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서 불끈거렸다. 성실하게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밥을 먹고 바로 앉아서 일하면 갑갑하기도 하고 속도 더부룩할 것 같아서 산책을 나갔다. 날이 흐리고 추웠다. 목이 허해서 후드 집업에 달린 모자로 목을 감쌌다. 훨씬 든든했다. 여유 시간이 20분밖에 없어서 멀리까지는 못 갔다.

 

 돌아오는 길에 까만 길고양이가 길을 뛰어다니길래 뒤에서 조용히 따라갔다. 미행한 건 아니고 가는 길이 겹쳤다. 내가 따라가는 줄도 모르고 밭에 들어가서 킁킁대며 냄새를 맡다가 

 

 

 뒤에서 따라오던 나를 발견하고 뒤돌아서 한 5초 멈췄다. 그러더니 막 달려가다가 뒤돌아서 날 보고, 내가 멈춰있으니까 또 달려가고, 자꾸 뒤돌아보길래 쳐다보지 않고 내 갈 길 갔다. 놀라게 해서 미안... 우리 집 고양이랑 닮아서 그랬어. 

 

 고양이와 헤어지고 난 뒤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졌다. 쏟아질까 봐 겁이 나서 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고양이는 잘 숨었을까?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잘 찾았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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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빼고는 아무도 마스크를 쓰지 않는 사무실에서 하루를 보내는 게 불안했고, 출퇴근하는 세 시간이 아까웠다. 일보다는 퇴근 시간 지옥철에서 흔들거리고 다른 사람의 어깨에 밀쳐지는 시간이 날 너무 지치게 했다. 그래서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입사한 지 이제 세 달 차라 좀 위험한 도전이긴 했지만 어차피 해야 할 작업이 정해져 있고 다른 사람과 굳이 소통해야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용기 내어 던져보았다. 작은 회사이고 아직 체계도 없어서 안 된다고 할까 봐 걱정했지만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휴. 다행이다. 

 

 

 오늘은 재택근무 첫 날이다. 남는 방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세팅했다. 밀렸던 독후감 두 편을 쓰니 한 시간 반이 후다닥 지나갔다. 이제 업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업무 시간에는 업무에만 빡 집중하는 게 효율도 좋고 나중에 죄책감도 안 생기니까 없는 시간인 셈 치고 일해야지. 호호.

 

 아무튼 오늘 아침을 뿌듯하게 보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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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쓰는 것보다 글쓰기 책을 읽는 게 훨씬 재밌다. 나만 그래? 다른 사람들은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고, 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글이 잘 안 써질 때는 어떻게 하고, 자신만의 글쓰기 팁은 무엇인지가 너무 너무 너무 궁금하다.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고 남들의 글쓰기를 알고 싶은 충동에 휩쓸린 나는 밀리의 서재에서 이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 뭐 천재들은 처음부터 잘 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나는 천재가 아니다. 학창시절부터 꾸준히 일기를 쓰고 시 같은 걸 끄적였기 때문에 10년 전의 글도 남아있는데, 지금 다시 보면 토가 나온다. 이 글도 몇 년 후에는 미래의 나에게 구토를 유발할 수도 있겠다. 

 

 쓰기의 물꼬를 틀 수 있는 몇 가지 팁과 함께 저자가 쓴 글을 소개하기도 하고 다른 작가의 책 이야기를 볼 수 있다. 다른 책 이야기의 비중이 너무 커서 의아했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책도 두 권 알게 되었으니 조용히 넘어가도록 하자(그 책들은  오지은의 익숙한 새벽 세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 2다. 익숙한 새벽 세시는 지금 읽고 있다).

 

 팩트폭력도 당했다. 보면서 어찌나 찔리던지. 아래에 그 내용을 소개한다.

 

 본문에 들어가기 위해 썰을 풀어야 한다고 어디서 가르치는지, '용건만 간단히'처럼 어려운 게 없다. 영화 리뷰를 과제로 내면 극장 가는 얘기부터 쓴다. 책 리뷰를 쓰라고 하면 책을 구매한 과정부터 쓴다. 여행기는 비행기표 구입부터 시작한다. 그 모든 과정은 재미있고 소중하며, 어떤 경우는 정보로서의 값어치도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체로 'TMI'다.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며, 읽는 사람에게는 하품 나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많은 글은 그렇게 '없어도 좋은' 서두를 갖고 있다.

 

 이 부분을 하이라이트 해두고 '찔리는구만.' 이라는 메모를 남겨두었다. 그래, 그 과정 같은 건 나에게나 재미있지 남들에게는 투 머치 인포메이션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20년 넘게 글을 쓰고 봐준 경력 덕분인지 글이 정말 깔끔하고 물흐르듯 술술 읽혔다. 에세이가 아니라 일종의 기술서인데도 말이다. 잘 훈련받고 스스로 열심히 연마했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그나저나 20년 넘게 글 써서 돈을 번다는 건 어떤 삶일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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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경우에 통하는 정답 같은 글이나 말은 없다고 생각하며, 쉬운 문장이 언제나 옳다고도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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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는 머릿속에 맴도는 어렴풋한 생각을 글이라는 형태로 끄집어내는 방법을 다룹니다. '이런 거 쓰고 싶어!'라는 마음의 '이런 거'를 문장으로 바꾸는 연습입니다. 본심의 번역작업이자, 타인과의 교류에 필요한 매너의 실천방식이기도 한 글쓰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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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 '글 쓰는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시대와의 부딪힘을 경험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를 얻는다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십 년 전에 아무에게도 토로하지 못하고 글 빚에 파묻혀 울던 내게도 그 말을 해주고 싶다.

널 위해, 그리고 지금의 내 친구들을 위해 책을 한 권 썼어.

잘 쓰는 사람만 보느라 스스로 나아질 기회를 날리지 말았으면 좋았을 걸.

십 년 전의 나야,

그만 울고,

그만 울라고.

글을 쓰려면 울 게 아니라 글을 써야 한단다.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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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기를 누설하자면, 글쓰기를 다루는 모든 책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소설 쓰는 비법은 '무조건 매일 같은 시간에 책상에 앉아서 뭐든 쓴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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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기 전에 답해야 할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왜 쓰는가? 무엇을 쓸 것인가? 누구를 위한 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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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 눈으로 볼 수 있게 시각화하는 작업이 글쓰기다. 같은 경험을 해도 그런 사고 과정을 거쳐 글을 쓰면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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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성취를 한 가까운 이에게 메일이든 문자메시지든, 고르고 고른 말로 축하하라. 인생은 피드백이다. 그렇게 받은 문장을 한번 읽고 지우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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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는 어떤 면에서 기인이고, 하나뿐인 방식으로 망가진 존재이고, 그 상태로 살아가기 위해 소통하는 법을 어렵게 배워가는 거라고, 그러기 위해서 제대로 듣는 법을 익혀야 말하고 쓸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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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한, 휴가를 마치고 일상에 막 복귀하려는 순간의 인간보다 야들야들한 생명체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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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쓰기, 그중에서도 사적인 산문 쓰기는 애처로운 데가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처음 시작하는 에세이스트는 대체로 실패하기 때문이다. 잃은 것을 글을 통해 되찾고, 되살리고, 복원하고 싶어 하는 사라들에게 산문 쓰기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 된다. 그리고 그것을 쓸수록 당신은 그것을 잃었음을 체득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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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사랑하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도 밤을 샐 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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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사이에 삶이 있고, 그 가운데의 모든 것이 우리 모두를 각기 다르게 만든다. 생사로만 말해지지 않는 개별의 삶과 고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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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문장은 '정리'하거나 '교훈'을 주려고 노력하는 대신 앞의 글을 해치지 않는 정도로 가볍게 써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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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했다면, 마지막 문장에서는 힘을 빼는 편이 힘을 주는 비법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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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책 출간을 위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고자 한다면, 에세이의 경우(사진이 있는지 얼마나 있는지도 큰 변수다) 원고가 적어도 원고지 300매(A4 30장, 당연히 글씨 크기와 행간은 전부 기본으로 했을 경우)는 되어야 한다.

 

 하루키의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고 소설을 써보고 싶어진 나는 잠꼬대하는 연인이 등장하는 소설을 두 페이지 정도 썼다.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내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숙고 끝에 써낸 문장이 마음에 쏙 드는 순간엔 기쁜데 나머지 시간들은 좀 괴로웠다. 내가 무슨 이야길 하고 싶은지 나도 잘 모르겠고. 글이 일기 쓰듯 술술 써지는 게 아니라 이것저것 재고 따지면서 쓰다 보니 진도는 영 안 나가고. 끙끙대면서 이 책을 펼쳤다.

 

 하루키가 처음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었다. 야구를 보다가 갑자기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쓰기 시작했다고. 원래는 재즈바를 운영하고 있었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기도 전인데 왜 알고 있나 생각해봤더니, 다른 하루키의 책 날개에서 본 것 같다. 그 이상을 더 알고 싶었다. 소설을 쓴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데 어쩜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꾸준히 하고 있을까?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소설이라는 형태로 풀어내는 걸까? 그러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할까? 이 사람이 소설을 통해서 이루어내고자 하는 건 뭘까?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하루키는 좀 무책임하다. 다른 어떤 계기가 있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니라 어느 날 문득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쓰기 시작했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미리 알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소설을 씀으로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깨닫고, 자기는 재능도 없고, 상을 받고 싶지도 않단다. 

 

 알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답은 별로 구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가 '소설 쓰기'에 대해 이야기 한다니, 주제만으로 너무 솔깃하지 않은가. 어떤 생각으로 쓰던 소설에 대한 감상이 변하는 것도 아니니 아무렴 좋다. 하루키는 왠지 감정이 없거나 있더라도 거의 메마른 로봇 같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자기 책을 읽어주는 독자에게 고마워하는 부분을 읽으며 생각을 고쳤다. 재밌게 읽고 있다는 걸 작가 본인도 알고 고마워하고 있구나.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보면 마음이 맨들맨들하고 약간 건조해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비가 촉촉하게 내린 숲 속을 걷는데 전혀 습하지 않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화창하고 밝은 느낌보다는 약간 흐린 날 속에 덩그러니 놓여 등장인물들을 따라 걸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을 때 펼치면 참 좋다. 원하는 만큼의 적적함을 얻을 수 있다. 나는 그 적적함이 좋아서 하루키를 끊지 못할 것 같다.

 

 소설 쓰기에 대한 책이다보니 첫 작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읽어본 적 없었는데 읽어보고 싶어졌다. 집필한 순서대로 한 권씩 읽어나가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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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보면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너무도 많은 것들을 끌어안고 있습니다. 정보 과다라고 할까 짐이 너무 많다고 할까, 주어진 세세한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자기표현을 좀 해보려고 하면 그런 콘텐츠들이 자꾸 충돌을 일으키고 때로는 엔진의 작동 정지 같은 상태에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도 뛰어볼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우선 필요 없는 콘텐츠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정보 계통을 깨끗하게 해 두면 머릿속은 좀 더 자유롭게 움직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꼭 필요하고 무엇이 별로 필요하지 않은지, 혹은 전혀 불필요한지를 어떻게 판별해나가면 되는가.

 이것도 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말하자면, 매우 단순한 얘기지만 '그것을 하고 있을 때, 당신은 즐거운가'라는 것이 한 가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행위에 몰두하고 있는데 만일 거기서 자연 발생적인 즐거움이나 기쁨을 찾아낼 수 없다면, 그걸 하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된 것이나 조화롭지 못한 것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때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즐거움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부품, 부자연스러운 요소를 깨끗이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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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세상은 그렇다 치고, 어떻든 소설가를 지망하는 사람이 할 일은 재빠른 결론을 추출하는 게 아니라 재료를 최대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축적해나가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 원재료를 많이 저장해둘 '여지'를 자기 자신 속에 마련해둘 일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최대한 있는 그대로'라고 해도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통째로, 그대로 기억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기억 용량에는 한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최소한의 프로세스=정보처리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우, 내가 기꺼이 기억 속에 담아두는 것은 어떤 사실의(어떤 인물의, 어떤 사상의) 흥미로운 몇 가지 세부입니다. 전체를 통재로, 그대로 기억하기는 어려우니까(라고 할까, 기억해봤자 분명 금세 잊어버릴 테니까) 그곳에 있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디테일을 몇 가지 추출해서 그것을 다시 떠올리기 쉬운 형태로 머릿속에 보관해두도록 합니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최소한의 프로세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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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뭔가를 쓰고 싶다는 표현 의욕은 없지 않은데 이거다 싶은 실속있는 재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스물아홉 살이 되기까지 소설을 쓴다는 건 생각도 못 했습니다. 글로 써낼 만한 재료도 없는 데도 재료가 없는 그 지점에서 뭔가를 만들어나갈 만한 재능도 없었습니다. 나에게 소설이란 단지 읽을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설은 상당히 많이 읽었지만 내가 그걸 쓰게 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요즘 젊은 세대들도 대체적으로 그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요. 아니, 우리가 젊었을 때보다 더욱더 '써야 할 것'이 줄었는지도 모릅니다. 자, 그럴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

 이건 뭐 'E. T. 방식'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쪽 창고를 열고 거기에 우선 있는 것을-뭔가 좀 시원찮은 잡동사니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아무튼 쓸어 모으고 그다음에는 분발해서 짜잔 하고 매직을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우리가 다른 혹성과 연락을 주고받기 위한 방도가 없어요. 아무튼 있는 대로 죄다 쓸어 모아 그걸로 노력해볼 만큼 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만일 그걸 해낸다면 당신은 큰 가능성을 손에 넣게 됩니다. 바로 당신이 매직을 구사할 수 있다는 멋진 사실입니다(맞아요, 당신이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건 당신이 다른 혹성에 사는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쓰려고 했을 때, '이건 뭐,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것을 쓰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통감했습니다. '아무것도 쓸 게 없다'는 점을 거꾸로 무기로 삼아서 그 지점에서부터 소설을 써 내려가는 수밖에 없겠다,라고. 그러지 않고서는 앞선 세대의 작가들에게 대항할 수단이 없습니다. 아무튼 가진 것을 죄다 쓸어 모아 얘기를 만들어보자고 생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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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대개 이때쯤에 한 차례 긴 휴식을 취합니다. 가능하면 보름에서 한 달쯤 작품을 서랍 속에 넣어두고 그런 게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립니다. 혹은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 사이에 여행을 하거나 번역 일을 몰아서 하기도 합니다. 장편소설을 쓸 때는 일하는 시간도 물론 중요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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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학교에 바라는 것은 '상상력을 가진 아이들의 상상력을 압살하지 말아 달라'는 단지 그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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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처럼 나는 새로운 소설을 쓸 때마다 '좋아, 이번에는 이런 것에 도전해보자'라는 구체적인 목표-대부분은 기술적인, 눈에 보이는 목표-를 한두 가지씩 설정했습니다. 나는 그런 식의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새로운 과제를 달성하고 지금까지 못 해본 것을 해내면서 나 자신이 조금씩 작가로서 성장한다는 구체적인 실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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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따금 독자에게서 아주 재미있는 편지가 날아오기도 합니다. '이번에 나온 시간을 읽고 크게 실망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나는 이 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음 책은 꼭 살 거예요. 열심히 해주세요'라는 편지입니다. 솔직히 말하겠는데, 나는 이런 독자를 정말 좋아합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틀림없는 '신뢰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나는 '다음 책'을 제대로 써야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책이 그/그녀의 마음의 들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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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심을 현혹하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그야말로 그 말 그대로였습니다. 사회 전체가 술렁술렁 들떠서 입만 벌렸다 하면 돈 얘기입니다. 차분히 자리를 잡고 시간을 들여 장편소설을 쓸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곳에 있다가는 나까지 자칫 망가져버릴 것 같다-그런 기분이 점점 강해졌습니다. 좀 더 팽팽하게 긴장된 환경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프런티어를 개척하고 싶다. 나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1980년대 후반에 일본을 떠나 외국을 중심으로 생활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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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포지션, 하나의 장소(비유적인 의미에서의 장소)에 안주해서는 창작 의욕의 신선도는 감퇴하고 이윽고 상실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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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어쩌다 소설을 쓰기 위한 자질을 마침 약간 갖고 있었고, 행운의 덕도 있었고, 또한 약간 고집스러운(좋게 말하면 일관된) 성품 덕도 있어서 삼십오 년여를 이렇게 직업적인 소설가로서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아직도 나를 놀라게 한다. 매우 크게 놀란다.

 

 다 읽는 데에 4년이 걸렸다.

 

 이 책은 대학교 도서관에 신간으로 들어왔다. 1Q84, 해변의 카프카, 노르웨이의 숲 등을 읽고 이미 하루키를 좋아하고 있던 나는 기사단장 죽이기를 얼른 집어 들었다. 좋았다. 좋았는데 왠지 모르게 끝까지 읽을 엄두가 안 났다. 이것보다 훨씬 두꺼운 책도 열심히 읽었으면서. 이 책은 뭔가 마음에 턱 걸린 것처럼 읽을 수가 없어서 내려놓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문득 하루키 책을 읽고 싶은 날이 있었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다 말았었다는 게 기억나서 전자책을 구매했다. 재미있게 읽다가 몇 문장이 기분 나빠서 읽기를 멈췄다. 어린 여학생이 자기 가슴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었는데 되게 불쾌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한 번 읽은 책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다 까먹어버리는데 신기하게 이 책의 내용은 잊어버리지 않았다. 가끔 생각났다. 기사단장 죽이기 그림에는 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며칠 전에 다시 생각이 나서 이어서 읽기 시작했다. 

 

 불쾌함을 까먹고 나서 보니 역시나 재미있었다. 왜 재미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서사가 재미있나? 등장인물이 마음에 드나? 무엇 하나 콕 찝어낼 수가 없었다. 아마 하루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분위기가 좋은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하루키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아니 사실 작가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보다는 내가 뭘 느꼈는지가 중요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차원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그 일들이 현실의 내게도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본 적 없고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귀신을 믿지 않으면서, 소설 두 권으로 이런 비과학적인 생각을 한다는 게 우습지만 별 수 없다. 하루키가 소설을 잘 쓴 탓이다. 

 

 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써야만 했을까. 소설가들은 왜 긴 이야기를 쓰는 걸까. 말하고 싶은 핵심만 적으면 사실 한 페이지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긴 소설을 쓰는 이유를 헤아려봤다. 짧은 문장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가닿을 수 없어서 긴 이야기를 마련하는 게 아닐까.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야만 독자의 의식이 빨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라서. 이 책을 읽은 후에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는데 비슷한 이야기를 하더라. 자기 능력으로는 몇 줄의 글로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정리할 수 없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나도 소설을 써보고 싶어졌다. 등장인물과 사건을 엮어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내는 것. 즐거울까? 괴로울까? 몇 줄 써봤는데 쉽지 않다.

 

 마음에 찌르르 다가오는 문장도 몇 줄 건졌다. 그리고 찌르르를 시작하게 됐다. 귀여운 그림과 함께 인상 깊은 문장을 썼다. 신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다. 이제 인스타그램에 올려보려고 한다. 그전에 블로그에 간단하게 기록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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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초상화 화가인 주인공. 어느 날 아내가 이혼을 요구한다. 따지지 않고 집을 나와 차를 타고 정처없이 돌아다니다가 친구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버지(아마다 마사히코. 화가) 댁에서 머물게 된다. 그 집 다락방에서 '기사단장 죽이기'라는 그림을 발견한다. 

 이웃에는 젊은 시절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진 멘시키가 살고 있다. 그는 자기의 딸일지도 모르는 마리에를 멀리서 바라본다. 

 종소리를 듣고 멘시키와 함께 집 뒤편에 있는 굴을 파낸다. 그 뒤로 있던 이데아(기사단장)이 가끔 나타난다. 

 주인공은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리고, 마리에는 사라진다. 주인공은 마리에를 구하기 위해 기사단장을 죽이고 다른 세계(같은 것)에 들어간다. 빠져나오니 현실세계의 굴 안이다. 

 마리에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고 주인공은 아내와 재회한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불멍을 때려봤다.

 

 마트에 마른 장작을 판다는 것도, 그 장작에는 잔가시가 엄청나게 많아서 손을 대면 대는 족족 따갑다는 것도, 장작을 격자모양으로 놓으면 불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골고루 잘 붙어서 예쁜 모양(🔥)으로 타오른다는 것도, 불 앞에서는 지나간 일이나 앞으로 있을 일보다는 현재에 집중하게 된다는 것도, 불 옆에 함께 앉아 시간을 보낸 사람을 더 좋아하게 된다는 것도, 불길이 줄어들었을 때 새 장작을 넣으면 더 확실하게 줄어든다는 것도, 하지만 꺼지지 않고 착실히 새로운 모양으로 타오른다는 것도, 아이유의 밤편지는 불멍하며 들으면 오백만배정도 더 좋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전히 모르는 것도 많다. 튀어오른 불씨는 어디로 가길래 그렇게도 갑작스럽게 사라지는지, 불을 보기 전과 후의 내 인생은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불과 함께 생긴 이산화탄소는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오늘 함께 불을 본 사람들과 나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지. 

 

 불을 보면서도 '지금 이 느낌과 생각을 잘 기록해둬야겠다' 하며 메모장을 켠다. 한 줄 쓰고 불 보고, 한 줄 쓰고 불 보느라 불에 완전히 몰입하진 못했다. 그게 좋다. 불은 꺼지면 그만이지만 글은 오래 남는다. 시간은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글은 시간에 휩쓸려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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